제2의 현대차·LG 공장 사태 나올라…美 비자 리스크 공포감(재종합)

경제

이데일리,

2025년 9월 05일, 오후 07:39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미국 관세에 이어 비자 걱정까지 늘었다.”

미국 이민당국이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합작 배터리 공장(HL-GA 배터리 회사) 건설 현장을 덮치면서, 한국 기업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단기간 머무를 경우 주재원 비자 없이 일하던 관행에 미국 정부가 칼을 들이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체포한 불법 체류 혐의자만 450여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동원해 미국 내 투자를 사실상 강제한 이래 한국 기업들의 미국 생산공장 건설이 줄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든 제2의 현대차·LG엔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 정부의 비자 발급이 깐깐한 만큼 원활한 공장 운영이 쉽지 않아질 수 있다는 걱정이 산업계 전반에 퍼지고 있다.

◇현대차·LG엔솔 공장 급습한 美 당국

LG에너지솔루션(373220)은 5일 입장문을 통해 미국 이민당국이 HL-GA 배터리 회사 건설 현장에서 대대적인 불법 체류자 단속을 벌인데 대해 “현재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임직원과 협력사 인원들의 안전과 신속한 구금 해제를 위해 한국 정부 및 관계 당국과 적극 협조하고 있다”며 “통역과 변호사 지원 등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현대차(005380)는 별도의 입장은 내지 않았다. 다만 현대차그룹은 이번 공장 외에 3만대 규모의 로봇 공장 신설 등이 예정돼 있어, 더 긴장감이 커지는 기류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 등이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서배나에 위치한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단속을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ATF" 애틀랜타 지부 엑스, 연합뉴스)< td>


앞서 이날 주류·담배·총기·폭발물 단속국 애틀랜타 지부(ATF Atlanta)는 엑스(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번 작전에는 국토안보수사국(HSI)과 연방수사국(FBI), 마약단속국(DEA), 이민세관단속국(ICEO), 조지아주 순찰국 등이 참여했다”고 했다.

이들은 불법 체류 혐의가 있는 450여명을 체포했는데, 이들 중에는 출장을 간 한국인 30여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는 현지 한국 영사 업무 담당자를 인용해 불법 체류 혐의를 받는 인원 중에는 한국에서 현지로 출장을 간 직원 30명 이상(협력업체 직원 포함)이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회의 참석과 계약 등을 위한 단기 상용(B1) 비자, 무비자로 90일간 머무를 수 있는 전자여행허가(ESTA)를 소지한 채 현지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비자의 체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단속 대상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비자 리스크 큰데 어떻게 투자하나”

미국 현지에 공장을 둔 한국 기업들이 한국인 숙련 인력을 보내려면 미국 정부로부터 관리자급 주재원비자(L1)를 받아야 한다. 이들은 통상 현지에서 3~5년 정도 일한다. 다만 많은 중소기업들은 L1 비자가 높은 연봉, 체재비, 보험 등 비용이 큰 만큼 E2 비자를 통해 현지에 보낸다. 이럴 때는 영주권 지원을 근로조건으로 내거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저렴한 연봉으로 영주권이 나오는 수년간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전문직 취업비자(H-1B)를 가진 한국인 인력을 찾을 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상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다.

다만 수년이 아니라 단기로 몇 달간 지내는 경우에는 B1 혹은 ESTA를 통해 일하는 게 관행처럼 여겨졌다. 미국 정부가 주재원비자를 마냥 내주지 않을뿐더러, 나온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이다. 이번 현대차·LG엔솔 급습 사태는 주재원비자 없이 B1 혹은 ESTA를 통해 단기간 일하는 관행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국내 산업계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첨단 전략 제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압박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와중에 이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주류·담배·총기·폭발물 단속국 애틀랜타 지부(ATF Atlanta)가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브라이언카운티에 있는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대규모 이민법 집행 현장에 참여했다며 공개한 사진. (사진=ATF 애틀랜타 엑스 계정)


반도체, 배터리 같은 첨단 제조업은 일반 가전 등보다 공장을 가동하는데 있어 숙련 인력들이 더 필수적이다. 이들은 초기 공장 가동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운영 노하우 등을 전수한다. 국내의 경험 많은 인력들이 주재원으로 부임하거나, 출장을 자주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ESTA를 통한 미국 업무가 막히면 사실상 공장 운영은 어려워진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ESTA를 이용해 출장을 갈 때 입국 거부 사례들이 적잖이 발생하고 있다고 다수의 기업 인사들은 전했다. 이를테면 삼성전자(005930)는 최근 사내 공지를 통해 “(ESTA로 미국을 가면) 1회 출장 시 최대 2주 이내로 일정을 잡고 초과 시에는 해외인사 담당자와 사전에 조율해 달라”고 당부했다.

◇기업들 당혹…“美 근무 방식 바뀔 것”

재계 한 고위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한국인 직원들보다는 공장 건설 현장의 외국인 인부 등이 다수인 것 같다”면서도 “미국 근무·출장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기 출장이라고 해도 체류 목적에 맞는 비자를 반드시 받고 가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업무 진척 속도는 느려질 게 뻔하다. 산업 현장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딜레마’다.

더 큰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짓고 있는 공장이 다수라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000660)를 비롯해 삼성SDI(006400), SK온 등이 미국 공장을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이다. 미국 당국이 한국 공장을 얼마든지 추가로 덮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건설 인부들의 인건비가 올라가면 추가적인 출혈은 불가피해 보인다.

또 다른 대기업 고위인사는 “미국 내 생산 공장 건설을 계획 중인 기업들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관련 대응이 약할 수밖에 없는 1차·2차 협력사들의 고민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이 인사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관세 불확실성에 이어 걱정거리가 또 늘었다”고 했다.

산업계에서는 결국 정부가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장기적으로 한국만을 위한 취업비자 신설을 추진하되, 단기적으로는 추가 단속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미국 정부에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교부는 이날 브리핑을 통해 “우리 국민의 권익이 부당하게 침해돼선 안 된다”며 유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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