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총알에 허무하게 깨진 '조선의 보물' [국현열화 24]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5년 9월 05일, 오전 07:40

이인성의 ‘주전자가 있는 정물’(1930s). 20여 년 짧은 화업 동안 작가는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작품은 그중 대표작.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주전자와 과일, 과도 등을 배치한 구도가 다소 불안정하지만 청록 테이블 위 하얀 천, 붉은 꽃무늬 벽지까지 강렬한 색의 대비로 화면에 생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1930년대 일본에 머무르던 당시 작가는 서구 인상주의부터 초현실주의까지 다양한 사조를 흡수하고 대담한 원색, 경쾌하고 짧은 붓터치 등으로 자신만의 화면을 완성해 갔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걸렸다. 패널에 유화 물감, 36.5×4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font> >

[정하윤 미술평론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피란을 떠나지 못했다. 불바다로 변한 서울에서 세 번째 아내가 출산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공포와 불안이 짙게 드리운 그해 11월 4일 밤, 술자리를 가진 뒤 귀가한 그를 누군가 찾아왔다. 치안대원이라고 불리던 무리였다. 술자리에서 잠시 있었던 실랑이가 탈이었다. “나오라!”는 고함을 들은 그가 집 밖으로 나온 순간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그의 머리에 적중했다. 피를 흘린 채 그는 다음 날 아침까지 버텼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의료 환경은 절망적이었다. 의사도, 치료제도 부족한 상황에서 생명을 붙잡을 길은 없었다. 1950년 11월 5일 오전 그는 큰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39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다.

‘조선의 지보’ ‘화단의 귀재’라 불린 미술가. 1930년대 조선에서 그는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손기정, 무희 최승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늘날 국민화가로 불리는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과 같은 세대였지만 더 먼저 주목받고 더 큰 인기를 누렸다. 바로 화가 이인성(1912∼1950)이다.

◇마라토너 손기정·무희 최승희와 어깨 나란히 한 화가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인성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수창공립보통학교 재학 시절 미술(당시 과목명은 ‘도화’였다) 과목에서 내내 만점을 받았고, 열여섯 살에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했다. 재주가 뚜렷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이인성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화구와 그림을 모조리 부수곤 했고 그래서 그림만 들고 도망쳤던 날도 있었다. 이인성이 상을 받았을 때조차도 오히려 화를 냈다. ‘환쟁이’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 수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학교 5학년 때 이인성은 여느 날처럼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재주 많은 이 소년을 알아보고 손을 내민 이가 있었다. 대구의 화가 서동진(1900∼1970)이었다. 일찍이 대구의 계성학교와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웠던 서동진은 이인성을 자신이 운영하던 대구미술사에 취직시켰다. 그곳에 조수처럼 드나들며 그림을 익힌 이인성은 1929년 열일곱 살 나이에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미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관전이었다. 총독부가 주관해 매년 열던 이 전시회는 화가를 꿈꾸는 이라면 누구나 도전하는 무대였고, 기성 화가조차 입선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그곳에서 10대 소년이 이름을 올린 것은 큰 사건이었다. 그제야 아버지도 이인성의 화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인정했다.

불과 2년 후인 1931년에는 ‘제10회 선전’에서 특선까지 차지했다. 그해 함께 특선을 받은 화가에는 나혜석(1896∼1948)이 있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청년 화가 이인성을 두고 주변에서는 “천재가 나타났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서동진은 이인성을 지원하기 위해 대구 유지들의 힘을 모았고, 대구에 머물던 일본인들의 협력까지 얻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후원자를 연결해 줬다. 도쿄 킹크레용 회사(오오사마상회)의 일본인 사장이었다. 그렇게 이인성은 형식상으로는 회사 직원 신분으로, 실제로는 후원을 받는 예술가로 도쿄로 건너가게 된다. 회사가 제공하는 물감과 캔버스를 마음껏 쓸 수 있었고 개인 작업실도 제공 받았다. 밤에는 야간 미술학교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서양화 기법을 배우는 기회까지 얻었다.

이인성의 ‘카이유’(1932). 일본 도쿄 유학 중에 그려 서울로 보내진 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특선을 받은 작품이다. 수상 이후 일본 궁내청이 사들여 오랫동안 일본에 있다가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하며 한국으로 건너왔다. 1929년 제8회를 시작으로 마지막인 1944년 제23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특선 등 주요상을 휩쓴 작가의 경력이 유명하다. 종이에 수채 물감, 72.5×53.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인성이 머무르던 1930년대 일본 화단에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인상주의부터 초현실주의까지 다양한 화풍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인성은 이를 적극적으로 흡수하며 자신만의 색을 찾아 나갔다.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하고 색들을 강하게 대비시키며 짧고 경쾌한 붓터치를 구사했다. 수채화에서 시작해 점차 유화로 넓혀 나갔고 대표작이 쏟아졌다. 푸른 하늘과 붉은 땅, 향토적이면서도 애수가 깔린 작품들로 ‘이인성의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다.

◇한국·일본 양국에서 미술상 휩쓴 최고의 화가

일본에 머무를 때에도 매해 ‘선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특선과 최고상은 늘 이인성의 것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가 이인성을 위해 있는 거냐”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일본 관전에서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도쿄로 간 이듬해 일본 최고 관전인 ‘제국미술전람회’에 나서 입선 명단에 바로 이름을 올렸다. 1935년에는 ‘제22회 일본수채화회전’에서 ‘아리랑 고개’로 최고상인 일본수채화협회상을 받았다. 일본인 화가들을 모두 제치고 받은 최고상이었다. 그해에는 일본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아내는 일본에서 의상을 전공한 신여성이자 대구 유지의 딸로 세련된 감각과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1936년에 귀국한 이인성은 장인이 운영하던 대구의 남산병원 3층에 ‘이인성양화연구소’를 열고 작품 활동과 더불어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딸 애향도 태어났다.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개인전도 열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권위 있는 전시에 출품할 때마다 최고상을 휩쓸며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명성과 부, 화목한 가정을 동시에 누리던, 그야말로 이인성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42년 아내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인성은 깊은 슬픔 속에서 아내를 추억하며 ‘여인의 초상’(1940s)을 그렸다. 작품 속에서 아내는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죽음을 은유하는 것처럼. 평소 밝고 경쾌한 원색을 사용하던 이인성이었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어둡고 차분한 색조를 사용해 가라앉은 분위기를 작품 가득 담아냈다. 당시 유행하던 정형화한 인물화와 달리 사적인 감정을 그대로 담은 이 작품은 그의 독창성과 내면의 고통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인성의 ‘여인의 초상’(1940s 초반). 1942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며 그린 작품이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서 후대는 부인이 죽은 이후 제작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체형이나 비례, 얼굴과 내면까지 정확한 관찰력과 빠른 필치로 포착한 작가는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부적인 묘사보다 간결하게 특징을 표현하는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27.8×22.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너무 짧은 전성기…희미해진 이름 마땅히 조명 받아야

아내의 죽음 이후 이인성의 삶은 급격히 무너졌다. 1944년에 재혼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중학교(현재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새 아내는 출산 후 집을 떠났다. 이인성은 1947년 세 번째 결혼으로 다시 가정을 꾸렸다. 다행히 개인전을 개최하고 회화연구소를 차려 운영하며 미술가로서의 행보를 이어갔다.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그리 편치 않았던 것 같다. 이인성은 이렇게 토로했다. “나의 생명인 화실을 떠나 서울에서 강짠지와 동태국을 먹으며 살아온 지 벌써 7년, 흰 벽을 보지 못하니 자유를 빼앗긴 죄수 같다”라고.

하지만 이조차도 너무 짧았다. 천재 화가의 최후라고 하기에는 가혹할 만큼 이인성은 허망한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예술가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나이에, 그것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일어난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광복 이후 추상미술의 흐름이 거센 한국화단에서 구상미술을 주로 그렸던 그의 존재가 희미해진 것 또한 안타깝다. 일본이 주도한 관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까닭으로 그간의 평가가 절하됐던 것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인성이 조금만 더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한국회화의 궤적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회화 또한 마땅한 조명을 받았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인성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에 남는 안타까움을 이런 상상으로나마 달래본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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