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만에 다시 만난 '동승'…지춘성 열연에 객석도 숨죽였다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5년 7월 21일, 오전 05:30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이까짓 것? 네들은 이까짓 것에 단 한 번이라도 뜨거워져 본 적 있어? (중략) 난 연극에 중독됐어. 이게 그토록 내가 날 괴롭히는 이유야.“

거침없이 대사를 쏟아내느라 목이 쉬어버린 도념 역의 배우 지춘성(60)의 감정이 폭발했다. 무대 위에서 예순 살 배우가 펼친 열연에 객석은 숨을 죽였다. 34년 전 미완의 연기를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군 도념. 그는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연극 ‘삼매경’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지난 17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삼매경’의 한 장면이다. 한국 근대 희곡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함세덕(1915~1950)이 쓴 ‘동승’을 원작으로 이철희 연출이 재창작한 작품이다. 1939년 초연한 ‘동승’은 같은 해 제2회 연극대회 극연좌상(현 동아연극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고,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이철희 연출은 이전에도 고전 작품을 재창작해 선보여왔다. 1943년 발표된 ‘맹진사댁 경사’를 다시 쓴 ‘맹’, 1980년 희곡 ‘윷놀이’를 각색한 ‘그, 윷놀이’ 등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최근 만난 이 연출은 ‘동승’을 재창작한 배경에 대해 “선배 극작가들이 썼던 작품을 보면 감히 후배들이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물의 깊이나 세상을 보는 시선이 폭넓다”며 “이런 좋은 작품들을 오늘날의 관객에게 선보이고 만나게 해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관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뜨거워 본 적이 있나’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연극 ‘삼매경’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34년 만에 ‘도념’으로 돌아온 지춘성

‘삼매경’이 개막 전부터 주목받은 이유는 34년 전 ‘동승’에서 동자승을 연기했던 지춘성이 예순의 나이에 ‘도념’으로 다시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제15회 서울연극제 남우주연상과 제28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인기상을 받았다. 지춘성은 “‘동승’을 한 뒤 주변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기에 내 삶은 이 작품 덕분에 이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이번 공연에 임하는 마음을 세 단어로 표현하자면 책임감, 부담감, 영광스러움”이라고 소회를 전했다.

원작 ‘동승’은 깊은 산속에서 지내며 자신을 두고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 도념의 이야기를 다룬다. ‘삼매경’은 ‘도념’의 이야기에 배우 지춘성의 자전적 연대기를 덧입혔다. 34년 전 자신의 역할을 실패라고 여기며 연극의 시공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저승길에 오른 도념이 삼도천(이승과 저승의 경계)으로 뛰어들어 과거와 현재, 연극과 현실이 혼재된 기묘한 ‘삼매경’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예순의 어른 ‘도념’이 삶을 이야기하듯 무대를 채우는 모습이 인상 깊다. 도념이 저승 가는 길에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선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었어요, 엄마”라는 도념의 말에 엄마는 “엄마는 늘 네 옆에 있었어. 네가 매일 머물던 그 겨울 숲의 딱새 소리는 엄마가 널 부르는 소리였다”며 아들을 위로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동자승이 마침내 엄마를 마주하는 순간이 관객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다만 시공간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인물의 내면 흐름에 집중하면서 감상할 것을 권한다. 이 연출은 “깊이 파고들기 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마지막 대사인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에 작품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면서 “우리는 모두 완성되지 못한 존재이지만, 그 미완성의 아름다움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공연은 8월 3일까지.

연극 ‘삼매경’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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