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는 시간과 정성, 그리고 고요를 빚는 일"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5년 7월 18일, 오전 06:01

부산 양조장 ‘기다림’ 의 조태영 대표
[부산=글·사진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부산 해운대의 한 조용한 골목. 바다 냄새 대신 누룩 향이 퍼지는 공간이 있다. 막걸리 양조장 ‘기다림’이다. 문을 열면 푸근한 온도와 깊게 숙성된 발효조의 향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도시 한복판에서 술을 빚는 조태영 대표를 만났다. 그는 ‘기다림’이라는 이름처럼 조용한 골목에서 느림이라는 전통으로 새로움을 빚고 있었다.

“빠르게, 더 많이 만드는 것이 미덕인 시대죠. 하지만 좋은 술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저희 막걸리는 240시간, 열흘 이상을 발효와 숙성에 온전히 씁니다.”

부산 양조장 ‘기다림’ 에서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막걸리 칵테일을 만드는 체험을 진행한다.
양조장 이름 ‘기다림’은 부산의 시화(市花)인 동백꽃에서 따왔다. 한겨울을 견디고 피는 꽃처럼 막걸리도 긴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향과 맛을 갖춘다. 조태영 대표는 말했다. “시간은 술의 스승입니다.” 기다림을 술에 담는 것이 곧 정성이라는 의미다.

이곳 술에는 인공 감미료도, 탄산도 없다. 하루 생산량은 약 1000병. 많지 않지만 원칙만큼은 단단하다. “건강하고, 숙취 없는 술. 자연스러운 단맛. 오래 기억에 남는 잔. 그게 제가 지향하는 막걸리입니다.”

조 대표의 이력은 특이하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일본에서 바텐더 기술을 익혔고 프랑스 와이너리에서 소믈리에 과정을 수료했다. 포도밭에서도 일했다. 그렇게 세계의 술을 배운 그는 결국 고향 부산으로 돌아와 ‘막걸리’를 택했다.

“여러 나라에서 술을 경험했지만 결국 내가 빚어야 할 술은 막걸리더군요. 이 술은 단순한 전통주가 아닙니다. 지역의 감성과 사람의 정성이 오롯이 담기는 문화예술입니다.”

그는 2014년 사직동에서 양조장을 시작해 최근 해운대로 이전했다. 도심에서 전통주를 빚는 일은 쉽지 않았다. 허가를 받는 데만 1년이 걸렸다. 대부분의 공정은 여전히 손으로 이뤄진다. 함께했던 직원들이 하나둘 떠난 적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만든 술’을 지키고 싶었다.

부산 양조장 기다림의 대표 메뉴인 ‘기다림’
‘기다림’은 술만 빚지 않는다. 브랜드에는 지역의 이야기와 정체성이 녹아 있다. 대표 제품 ‘매료’는 부산 장산범 설화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 마음을 홀린다는 전설처럼 “마시는 순간 마음을 사로잡는 술”을 만들고 싶었다. 매료는 부산 지역특산주 1호로도 지정됐다.

또 다른 제품 ‘동네아들’은 야구선수 이대호와 협업해 만든 막걸리다. 부산 토박이, 손맛 좋은 청년이 빚은 술이라는 콘셉트로 지난해 대한민국 주류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가장 기쁜 순간은요, 사람들이 ‘이거 누가 만든 거예요?’라고 물어볼 때예요. 그건 우리 술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이니까요.”

이제 ‘기다림’은 해외도 바라본다.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소규모 수출을 시작했고, 반응도 긍정적이다. “부산 쌀로 만든 막걸리가 세계 시장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진정성이 강점이 되죠.”

그에게 막걸리는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요즘 세상은 너무 빨리 돌아가요. 저는 그 흐름에 쉼표 하나를 찍고 싶었습니다. 막걸리 한 잔에 담긴 시간이, 마시는 사람에게도 고요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해운대의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주택가 골목. 그곳에서 조태영 대표는 오늘도 술을 빚는다. 손끝에서 시작된 온기, 기다림 속에서 피어난 풍미. ‘기다림’의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한 잔의 술로 시간의 가치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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