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이나 수사기관에 타 조직원 범죄를 진술하는 등 배신 행위는 무조건 응징한다.”
“선배를 모시고 운전하는 경우 좌회전·우회전 시 미리 ‘좌회전하겠습니다 형님, 우회전하겠습니다, 형님’이라고 보고한다.”
영화 속 장면이 아니다. 경찰이 파악한 서울 서남권 조직폭력단체 ‘진성파’의 내부 행동강령에 포함된 내용이다. 서울경찰청은 17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4조 ‘단체 등의 구성·활동’ 위반 혐의로 진성파 조직원 39명을 검거하고 이 중 9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조직 소속 6명도 함께 검거했으며, 해외로 도피한 진성파 조직원 2명에 대해서도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경찰이 확보한 진성파 단체 모임 사진. (사진 제공=서울경찰청)
경찰에 따르면 이 조직은 서울 금천구 일대 합숙소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신입 조직원을 상대로 ‘선배 조직원에 대한 복종’, ‘조직 충성서약’, ‘수사 회피 요령’ 등을 교육하는 등 행동강령을 운영했다. 위계가 강화된 조직 내에서는 하부 조직원을 폭행하거나, 반발 시 가혹행위를 가하며 강제 복종을 유도했다.
경찰이 수사를 통해 파악한 진성파의 행동강령에는 조직과 선배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조직이탈자는 손가락을 자른다”, “후배가 사고를 치면 합숙소장 아래로 줄 서서 체벌을 받는다”는 등 극단적인 위계 문화가 들어있었다. ‘식구들의 경조사에는 반드시 참석하며, 해외에 있어도 경조사 일정에 맞춰 귀국한다’는 내용도 있다. 실질적인 생활 통제 수준의 명령으로, 조직원들의 일상까지 조폭 조직이 통제한 것이다.
수사기관의 조사를 피하기 위한 내용도 담겼다. ‘수사기관에 체포되거나 조사를 받을 때는 절대 조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조직 및 불법 사업 관련 대화는 삭제 기능이 있는 메신저를 사용한다’, ‘접견 중에는 “일”을 한다는 식으로만 표현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등으로 수사 대응 방식까지 조직 차원에서 교육하고 있었던 셈이다.

경찰이 파악한 진성파 행동강령. (사진=김윤정 기자)
조직 내부의 위계질서도 행동강령을 통해 체계적으로 관리된 것으로 나타났다. 강령에 따르면 후배는 선배에게 반드시 90도 인사를 해야 하고, 멀리서 선배를 발견하면 손에 든 물건을 내려 인사를 해야 한다.
선배 앞에서는 양손을 공손히 모아 예를 표하고, 대화 시에는 반드시 ‘형님’이라는 호칭과 ‘다나까체’(경어체)를 사용해야 했다. 전화를 걸 때도 “형님, ○○아우가 전화 올렸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내야 하며, 1년 차 이하 조직원이 “편히 쉬셨습니까”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되는 식이다. 운전 시에도 ‘좌회전하겠습니다, 형님’, ‘우회전하겠습니다, 형님’이라고 말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했고, 선배와 동석 시 담배를 피우지 않는 등 일상적인 행동까지 엄격히 통제됐다.
이들은 타 조직과의 충돌을 대비해 ‘비상타격대’를 따로 운영했으며, 흉기·소화기·야구방망이 등을 사전에 준비해 물리적 충돌에 대비했다. 실제로 타 폭력조직과의 분쟁 과정에서는 생수통에 테이프로 감싼 물체를 비치하거나, 흉기 사용법을 교육한 정황도 드러났다.

17일 배은철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 1팀장이 관련 브리핑을 하는 모습. (사진=김윤정 기자)
이같은 행동강령은 조직폭력단체 관련 처벌 조항인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처법) 제4조 ‘단체 등의 구성·활동’ 혐의를 적용하는 근거가 됐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통해 단순 폭력행위를 넘어서, 실제 조직적 실체를 가진 폭력단체의 운영 양상을 입증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 조직폭력단체들은 과거처럼 단순 폭력이나 성매매·도박 등에 그치지 않고 유심 범죄·대포통장개설·자금세탁 등 불법 경제활동에 조직적으로 가담하는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진성파 조직원들 역시 성매매 알선 사이트를 통한 영업,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 유심 유통 및 자금세탁 등 각종 지하경제 활동에 연루돼 있었다. 특히 조직 내 행동대장들은 ‘프로젝트 조직’을 따로 편성해 도박장 개설, 범죄 수익 은닉 등 기능을 분담하며 운영해온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다만 이러한 활동은 기존 법리로는 조폭 단체 혐의를 적용하기 어려운 사례에 해당한다. 배은철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 1팀장은 “폭처법 제4조를 적용하려면 다수의 인원 간 엄격한 위계질서, 연락체계, 지역 기반, 상명하복 구조 등이 모두 입증돼야 하는 만큼 요건이 까다롭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에는 조폭 단체들이 경제사범과 엮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 목적 자체가 경제범죄일 경우 폭처법 적용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경찰은 이번 진성파 사건에서는 행동강령뿐 아니라 조직의 연혁까지 추적해 법리 적용의 근거를 확보했다. 진성파는 1983년 같은 중학교 출신의 학생폭력서클에서 출발해 폭력조직화됐으며,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2010년대까지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최근까지도 잔존 조직원들이 합숙소 운영 등 방식으로 조직적 활동을 이어온 정황이 다수 확인됐다는 것이 경찰의 판단이다.

경찰이 확보한 진성파 단체 모임 사진. (사진 제공=서울경찰청)
경찰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직폭력단체에 대한 수사와 단속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최근 조폭 조직들이 폭력에서 경제형 범죄로 활동을 전환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만큼, 관련 수사 체계를 보완해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배 팀장은 “기존 폭력단체에 젊은 세대가 유입되거나 조직이 재편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박·피싱·성매매 등 지하경제 범죄에도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며 “조폭 활동을 철저히 차단해 국민의 평온한 일상을 지켜나가겠다”고 강조했다.